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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엔(尚円) 가나마루(金丸)를 만나다 - 섬의 보물 이제나촌의 사적・문화재

쇼엔(尚円) 가나마루(金丸)를 만나다 - 섬의 보물 이제나촌의 사적・문화재

Main Contents

쇼엔왕가의 유산

왕통과 유서 깊은 보물들 찾기

이제나촌 지정 사적・명승지

사무레미치

또한 이제나촌 지정 문화재인 사무레미치는 이제나 마을에 위치하는 메카루가(銘苅家) 주택과 다마우둔(玉御殿)을 잇는 총 길이 약 2km의 옛길로, 일찍이 구지누시미(公事清明祭)의 참배길이기도 했습니다. 이 길을 통과해 다마우둔(玉御殿) 으로 향했을 것입니다. 덧붙여 사무레란 사무라이 즉 무사를 뜻합니다.

사무레미치

구지누시미

오키나와는 일반적으로 음력 3월에 친족과 문중 사람들이 조상의 묘에 모여 술과 음식들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며 음식을 나눠먹는 '시미'를 지냅니다. 1870년에 시작된 구지누시미(公事清明祭)는 왕족과 관련 깊은 행사로서 슈리 이외의 지역에서 지내는 유일한 시미라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시미를 지내는 장소는 이제나 다마우둔(玉御殿)입니다. 왕가와 관련 깊은 '유투누치(四殿内)'라고 불리는 메카루(銘苅) 문중, 나카(名嘉) 문중, 이레이(伊礼) 문중, 다마키(玉城) 문중의 관계자 및 이제나 촌장들을 비롯한 공무원 40〜50명 정도가 참석합니다.

구지누시미

당일, 술과 음식들을 조상에게 올리고 참석자들이 향을 피웁니다. 이어서 일어나 손을 모아 절을 하는 동작을 네 번 반복하는 요쓰미하이(四つ御拝)가 거행됩니다. 그리고 차와 술을 따르고 종이돈을 태운 후, 전원이 합장을 합니다. 해에 따라서는 이어서 춤, 노래, 산신 연주 등이 봉납되고 제일 마지막에 참석자 전원이 다 함께 음식을 나눠 먹습니다.

이제나촌 지정 유형문화재 고문서・공예품

메카루 문중 소장품

이제나섬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여러 역경을 딛고 류큐 국왕의 자리에 오른 쇼엔(尚円). 메카루(銘苅) 가문은 본래 쇼엔의 숙부 집으로 제2쇼씨(尚氏) 초대 국왕이 된 쇼엔은 메카루 가문의 사람들을 지토(地頭)라는 직위에 우대하는 등 다양한 특혜를 주었습니다. 제2대 이후에도 왕가와 메카루 가문과의 밀접한 관계는 계속 되었으며 슈리 조정은 보물이라고 할 수 있는 많은 물건들을 메카루 가문에 하사했습니다. 이러한 귀중한 하사품에는 고문서와 미술 공예품이 포함되었으며 훗날 이제나촌에 기증되어 현재 볼 수 있습니다. 이 소장품들은 역사적 예술적으로 가치가 높고 언뜻 보기에도 가치있는 문화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파 무늬 구슬 주석병(黄色地巴紋御玉貫)

삼파 무늬 구슬 주석병(黄色地巴紋御玉貫)

제사 때 사용하는 주기(酒器)로 900ml 은제의 주석병 두 개가 한 쌍입니다. 유리구슬을 엮어 만든 덮개와 뚜껑으로 장식한 것이 큰 특징입니다. 구슬 주석병 전문 장인이 제작한 덮개는 노란색 바탕에 흑색, 적색, 백색, 자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문양이 매우 컬러풀합니다. 또한 본체가 되는 병 또한 주석(鑄錫) 장인이 제작했습니다. 미술적 기술적으로 매우 고급스럽고 귀중하며 그밖에 슈리성공원, 오키나와현립 박물관・미술관, 나하시 역사박물관 등에서 여러 점이 확인되기만 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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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칠 박회 삼파 무늬 찬합(朱漆箔巴紋食籠)

주칠 박회 삼파 무늬 찬합(朱漆箔巴紋食籠)

류큐의 찬합(食籠)은 1월 1일과 제사 때, 신에게 쌀을 바치기 위한 도구였습니다. 주칠 박회 삼파 무늬 찬합(朱漆箔巴紋食籠)도 구지누시미(公事清明祭) 때, 의례용 생쌀을 넣는 용기로 사용되었습니다. 뚜껑과 윗단, 아랫단과 받침으로 나누어진 2단 찬합(食籠)으로 받침도 포함해 전체를 주칠했습니다. 각 단과 뚜껑은 각각 금박회(金箔絵)의 삼파 무늬를 그려 넣었습니다. 또한 윗단의 바닥 뒷부분, 아랫단의 받침 안쪽과 바닥굽은 흑칠을 했습니다. 구지누시미에서는 사진과 같이 주칠 박회 삼파 무늬 굽다리 접시(朱漆箔巴紋足付盆) 위에 올려놓고 사용하였으며 굽다리 접시에도 금박회의 파문을 그려 넣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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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칠 박회 삼파 무늬 찻잔(朱漆箔巴紋天目台)

주칠 박회 삼파 무늬 찻잔(朱漆箔巴紋天目台)

천목(天目)은 중국 절강성의 천목산에서 유래하는 도자기로, 깔때기 모양을 하고 조금 작은 받침대가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그릇을 올려놓는 받침대와 세트로 사용합니다. 사진에서는 뚜껑을 닫은 천목 그릇을 주칠 박회 삼파 무늬 찻잔(朱漆箔巴紋天目台) 위에 올려놓고 있습니다. 구지누시미(公事清明祭) 때는 이 상태로 향로 좌우에 놓습니다. 천목 그릇을 올려놓은 받침대의 꽈리하고 부르는 부분과 뚜껑에 금박회(金箔絵)의 삼파 무늬를 그려 넣었습니다. 덧붙여 슈리 조정이 구지누시미를 실시할 때 필요한 도구를 제시한 '어도구첩(御道具帳)'에는 '금빛 쇠붙이로 장식한 찻잔(金覆輪御天目台)'도 존재한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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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칠 박회 삼파 무늬 차상자•차통(黒漆箔巴紋茶箱・茶筒)

흑칠 박회 삼파 무늬 차상자•차통(黒漆箔巴紋茶箱・茶筒)

머리 부분이 평평한 차통과 그것을 담는 상자가 한 세트입니다. 상자는 사시모노(指物)라는 기법으로 만든 접는식 뚜껑이 달려있고, 차통은 얇게 자른 목재를 구부려서 원통형으로 만들었는데 소위 마가리모노(曲物)라고 합니다. 양쪽 모두 재료는 불분명합니다. 차통 안에는 19세기에 류큐에서 만들었다고 하는 놋쇠제의 찻숟가락도 들어 있습니다. 차 상자, 차통 모두 전체적으로 흑칠을 했고 상자의 뚜껑 천판과 차통의 뚜껑에는 금박회의 삼파 무늬를 그려 넣었습니다. 어도구첩(御道具帳)에는 상자가 딸린 두절형(頭切型) 차통이 한 세트 있고 가늘고 평평한 무명 끈도 함께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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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 향로(宣徳香炉)

선덕 향로(宣徳香炉)

중국제의 놋쇠(동과 아연의 합금)를 재료로 주조한 향로입니다. 저부에는 '대명선덕년제(大明宣徳年製)'라고 표기되어 있고 어도구첩(御道具帳)에는 '선덕 향로 1개'라고 기재되어 있으며 선덕 연대(1426년-1435년)에 만들어진 형태의 향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단, 대명선덕년제라는 이름을 갖는 향로는 청조(1644년-1912년) 때, 모조품이 대량으로 생산되었으며 동일한 제품이 오키나와현에서도 여러 점 확인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향로들은 청조 때 만들어져 수입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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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제 납촛대(錫製蝋燭台)

주석제 납촛대(錫製蝋燭台)

주석을 단조(鍛造)해 만든 촛대로 제사 때는 물론 구지누시미(公事清明祭)에서도 사용했습니다. 받침대에는 양각(돋을새김)의 삼파 무늬가 있고 촛농 받침대 부분은 따로 만들었으며 몸통 부분을 납 땜(금속을 접착시키는 용접 방법)한 것이 특징입니다. 윗부분과 촛대 몸체 부분의 가장자리를 바깥쪽으로 꺾어 올리는 기법을 사용했다고 하는, 류큐제 주석 그릇(錫器)의 특징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류큐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단, 이러한 기술은 중국의 주석 그릇(錫器) 제작 방법의 영향도 받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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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제 세 다리 풍로(銅製三足風炉)

동제 세 다리 풍로(銅製三足風炉)

다도용으로 물을 끓이는 데 사용하는 도구로 동(銅)을 단조(鍛造)해서 만든 일본제로 생각됩니다. 실내라면 집 안에 있는 화로를 사용하겠으나 이 풍로는 야외에서 물을 끓일 때 사용했습니다. 가장자리를 잘라서 바람이 들어가도록 했고 안에는 목탄 등을 넣어 불을 피웠으며 그 위에 물을 담은 솥을 올려놓고 가열시켰습니다. 덧붙여 풍로는 일본의 다도에서도 사용되었는데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모신 센노리큐(千利休) 이전에는 실내와 야외, 계절에 관계없이 차를 마시기 위해 물을 끓일 때는 풍로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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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유 삼파 무늬 주전자(白釉巴紋茶家)

백유 삼파 무늬 주전자(白釉巴紋茶家)

차가(茶家)는 류큐 방언으로 추카 즉 도기 제품의 주전자를 뜻합니다. 백색의 유약을 바르고 구운, 삼파 무늬가 들어간 주전자는 일본제로 어도구첩(御道具帳)에는 '和同(어차가) 1개 무늬 있음'이라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또한 만드는 방법과 도자기의 표면 상태로부터 류큐와 관계가 깊은 사쓰마(薩摩)의 사쓰마도자기로 생각됩니다. 덧붙여 차가라는 주전자는 사쓰마도자기에서는 술주전자(酒器)로 취급됩니다. 몸통 양쪽의 삼파 무늬를 손으로 그리지 않고 틀을 사용해 새겨 넣었을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전용 보관 상자에는 '1 일본제 차가/류큐어차가/입가(入家)•'라고 쓰여 있고 류큐도기 주전자와 함께 보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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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갈색 의상(木綿茶地衣装)

무명 갈색 의상(木綿茶地衣装)

메카루(銘苅) 가문의 당주, 메카루 페친(銘苅親雲上)이 구지누시미(公事清明祭) 때 착용한 의상으로 면 소재의 겹옷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메카루 가문의 의상 두 벌은 소위 통소매(소매부리의 폭이 넓다)로 겨드랑이에 이음천을 대었고 옷깃 폭이 넓어서(바깥쪽으로 한 번 접어서 입을 수 있음) 류큐의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류큐에서 짠 직물로 추정되나 상세한 내용은 현재 확실치 않습니다. 남성은 웃옷인 동의(胴衣)와 하카마(袴)를 입었고 그 위에 겉옷을 걸치는 것이 정장 차림새인데 메카루 가문에는 사진의 겉옷만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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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꽃무늬 사포(絹浅地紋紗布)

비단 꽃무늬 사포(絹浅地紋紗布)

향 상자를 덮는 용도로 하사받았다고 전해집니다. 어도구첩(御道具帳)에 '美辻壱枚鏡赤地金入錦台水色紗'라고 기재된 물건이라고 생각됩니다. 미쓰지(美辻)는 천의 중앙(鏡)에 사각형의 비단 등 다른 천을 꿰맨 것으로 이제나섬의 나카(名嘉) 가문, 구메섬의 우에즈(上江洲) 가문에 동일한 물품이 남아 있습니다. 어도구첩에는 붉은색 바탕천이라고 기재되어 있으나 색이 바래서 원래의 색이 확실하지 않습니다. 단 평금사로 짠 꽃 문양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변 부분(둘레)은 하늘색 견사로 짠 모란당초의 바탕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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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케이왕이 메카루 페친에게 보낸 하달 문서

쇼케이왕이 메카루 페친에게 보낸 하달 문서

메카루(銘苅) 가문은 1744년에 정식으로 귀족으로 승격되어 계보(족보)를 하사받았습니다. 이를 축하하기 위해 상당히 이례적으로 쇼케이왕(尚敬王, 재위 1713년~1751년)이 친필로 1745년 3월 5일자로 당시의 메카루 가문 당주에게 보낸 문서가 이것입니다. 문서에는 메카루 가문이 지난 해에 귀족으로 승격된 것을 축하하며 기념품을 하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국왕 친필 문서 원본은 몇 점 남아 있지 않아 매우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메카루 가문은 이 문서를 족자로 만들어 특별한 날에만 도코노마(床の間)에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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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헤야섬 다마우둔 공사첩

이헤야섬 다마우둔 공사첩

이제나의 다마우둔(玉御殿)에서 구지누시미(公事清明祭)를 실시하는 방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술한 소위 안내서. 내용은 앞서 서술한 대로 구지누시미를 실시하는 방법과 다마우둔의 관리, 청소, 수리에 대해서 쓰여 있습니다. 1870년에 행해진 구지누시미(초제, 御初祭)를 바탕으로 류큐 조정의 관리들이 협의해 작성하고 장관급인 삼사관(三司官)이 이를 승인한 후, 이듬해부터 메카루 페친(銘苅親雲上)을 중심으로 행하는 구지누시미를 위해 이제나측에 제공했습니다. 공적 행사로서의 시미(清明祭)의 실상을 알기 위한 귀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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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카루오야코공사첩(銘苅大屋子公事帳)

메카루오야코공사첩(銘苅大屋子公事帳)

메카루(銘苅家) 가문의 당주, 메카루 페친(銘苅親雲上)의 직무를 규정해 놓은 문서입니다. 단, 내용은 메카루 페친의 슈리 입성(首里上り)에 관한 슈리 조정과 왕가와의 의례적인 관계를 서술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① 유투누치(四殿内)에서 슈리성에 진상품을 바칠 때의 준비. ② 이헤야노아무카나시(伊平屋の阿母加那志)의 대리인으로서 헌상품을 바칠 때의 절차. ③ 슈리성과 우둔(御殿)에 진상하는 물품의 규정. ④ 이헤야노아무카나시의 대리인으로서 요리를 먹을 때의 규칙. ⑤ 엔카쿠지(円覚寺) 절에서 쇼엔왕의 위패에 향 피우기. ⑥ 축의에 대한 답례(하사품)을 받는 방법과 예의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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御拝領亀甲墓絵図 写真

귀갑묘 그림(御拝領亀甲墓絵図)

쇼엔왕(尚円王)과 특별히 유서가 깊은 메카루(銘苅) 가문, 나카(名嘉) 가문, 이레이(伊礼) 가문, 다마키(玉城) 가문을 '유투누치(四殿内)'라고 합니다. 슈리 조정에서 유투누치에게 하사한 묘(御拝領墓)의 그림이 이 문서입니다. 1870년에 조성된 이제나섬 최초의 귀갑묘(亀甲墓)로 그림에서 '경내 나카야마 숲에 있음'이라고 기록된 점으로 보아 나카야마 숲(산 중의 숲)에 조성되었다는 것과 그림이 당시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힌푼을 갖추고 소나무인 듯한 나무들에 에워싸여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1897년에 묘는 맛테라노하마(해변) 안쪽으로 이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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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나촌 지정 유형문화재 공예품

이헤야의 아무 가나시 하사품

이제나의 유투누치(四殿内) 중 하나인 나카(名嘉)가문은 쇼엔(尚円)의 누나, 마세니카네(真世仁金)가 시집을 간 곳입니다. 왕위에 오른 쇼엔은 나카 가문에 '이헤야노아무카나시(伊平屋の阿母加那志)'라는 직위를 주었습니다. 이는 고급 신녀인 삼십삼군(三十三君)의 한 사람이며 2년에 한 번 슈리성에 입성하여 신년 의식에 참석하는 등 특별한 존재임을 뜻합니다. 나카 가문의 딸은 대대로 이 신녀직을 맡았습니다. 이러한 집안이었기 때문에 슈리 조정으로부터 많은 하사품을 받아 이를 소장해 왔습니다. 이것들 중 15점의 미술 공예품이 이헤야노아무카나시가 받은 하사품으로서 1977년 이제나촌의 유형문화재에 지정되었습니다.

비단 자색 의상(絹紫地衣装)

비단 자색 의상(絹紫地衣装)

슈리 조정에서 하사받은 아무카나시(阿母加那志)의 정장용 시키가미(色神) 의상의 겉옷으로 1월 1일(우둔), 시미(다마우둔), 국왕 세습식, 아무카나시 세습식 때 착용했습니다. 오키나와 전쟁 전까지는 1월 1일에 착용했다고 합니다. 겉감은 날실과 씨실 모두 보라색의 고급 견직물로 작은 모란, 대나무, 나비 문양이 들어가 있고 안감은 날실이 적색, 씨실이 무늬가 없는 곤색 가히비단으로 되어 있습니다. 도쿄 국립박물관이 소장하는 '왕자와 고위 관리와 부인의 그림(王子按司婦人の図)' 중의 대례복과 거의 동일하다는 점에서 상류 계급의 의상으로 볼 수 있으며 포백(布帛)은 중국제, 바느질은 류큐라고 추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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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구슬 주석병(緑地御玉貫)

녹색 구슬 주석병(緑地御玉貫)

메카루(銘苅) 가문의 하사품 중에 노란색 바탕의 구슬 주석병(御玉貫)이 있는데, 나카(名嘉) 가문도 녹색의 구슬 주석병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540ml 주석 병이 녹색, 백색, 적색, 황색, 흑색의 작은 유리구슬을 엮어 만든 덮개와 뚜껑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에 걸쳐 류큐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헤야노아무카나시(伊平屋の阿母加那志) 취임 의식 때, 국왕과 왕비와 기코에오키미(聞得大君, 류큐의 최고 신녀)에게 술을 헌상하기 위한 용기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메카루 가문의 노란색 구슬 주석병보다 상당히 오래된 연대에 슈리 조정이 하사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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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옥

곡옥

오키나와 전쟁 전까지는 1월 1일에 아무카나시(阿母加那志)가 시키가미(色神) 의상과 함께 착용했다고 합니다. 큰 것은 목에 걸고 작은 것 두 개는 양 팔에 차서 사용했습니다. 쉼표 모양처럼 생긴 곡옥(曲玉)은 마노, 염주알은 수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다른 지역에 남아 있는 곡옥류와 비교해 수정이 크며 아름다운 상태를 보존하고 있습니다. 본래 양손에 수옥(袖玉)을 사용하는 일은 거의 없으며 게다가 세 개 모두 규격이 다르기 때문에 동일한 연대에 하사를 받았거나 한 세트로 제작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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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칠 박회 산수누각인물 무늬 원통형 함(潤漆山水楼閣人物箔絵丸櫃)(상자 입)

윤칠 박회 산수누각인물 무늬 원통형 함(潤漆山水楼閣人物箔絵丸櫃)(상자 입)

곡옥을 보관하는 원통형 함으로 1월 1일에 가케고(懸子)라는 상자 위에 곡옥을 올려 놓고 장식했습니다. 함 전체는 주칠과 흑칠을 섞어 갈색으로 옻칠해 차분하고 기품이 느껴지는 색조로 완성되었습니다. 나무 바탕 재질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마가리모노(曲物)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뚜껑 측면과 본체의 무늬가 이어지고 본체 측면 네 곳에 산수인물도가 그려져 있으며 바깥으로는 칠보 연결 무늬를 볼 수 있습니다. 구메섬에서도 신녀의 원통형 함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침금제가 많고 박회만으로 된 것은 적어서 박회 원통형 함이 귀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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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나촌 지정 유형문화재 공예품

니시노후타카야다노아무의 하사품(이레이 가문)

쇼엔(尚円)은 왕에 즉위한 후 숙모에게 '후타카야다노아무(二かや田の阿母)'라는 신녀직을 주었습니다. 신녀가 죽은 후, 숙모의 두 딸이 그 직위를 승계했기 때문에 후타카야다노아무를 남과 북으로 나누어 두 사람이 맡게 되었습니다. 동생은 니시노후타카야다노아무(北の二かや田の阿母)라고 칭하며 이레이(伊禮) 가문의 여성이 그 신녀직을 대대로 승계하게 되었고 언니는 하에노후타카야다노아무(南の二かや田の阿母)가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후타카야다노아무는 이헤야노아무카나시(伊平屋の阿母加那志)가 교체되었다는 보고를 위해 슈리성에 수행하거나 제사 때 자리 위치 관계 등으로 아무카나시의 수행 신녀라고 합니다.

니시노후타카야다노아무의 하사품(이레이 가문)

니시노후타카야다노아무도 슈리 조정으로부터 곡옥과 원통형 함 등의 제사도구, 의상을 하사받았으며 파손과 분실, 노후화를 거치면서도 그 일부는 이레이(伊禮) 가문이 보관하고 있습니다.

니시노후타카야다노아무의 하사품(이레이 가문)

이제나촌 지정 유형문화재 공예품

하에노후타카야다노아무의 하사품(다마키 가문)

쇼엔왕(尚円王)의 숙모는 후타카야다노아무(二かや田の阿母)가 되었고 그의 두 딸(쇼엔의 사촌 형제)이 각각 남과 북으로 나누어 그 직위를 승계했습니다. 훼노후타카야다노아무(南の二かや田の阿母)는 다마키(玉城) 가문이 대대로 신녀직을 맡아 왔습니다. 북쪽의 이레이(伊禮) 가문과 마찬가지로 다마키 가문도 제사도구, 의상 등의 하사품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초대 후타카야다노아무는 쇼엔왕으로부터 가마(籠)를 하사받아 구지누시미(公事清明祭) 등의 제사 때 사용했다고 합니다. 나아가 다마키 가문과 이레이 가문은 장인에게 의뢰해 각각 새로운 가마를 만들게 하였고 남북의 후타카야다노아무는 이것을 타고 제례의식과 제사에 행차했습니다. 가마를 짊어진 사람은 친족의 젊은이들이었다고 합니다.

이제나촌 지정 유형문화재 고문서

고문서

류큐왕국 시대의 실상을 나타내는 문헌은 별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소실한 주요 이유로서 태풍을 비롯한 자연재해와 격렬한 지상전이 펼쳐졌던 오키나와전쟁 등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한편, 지상전이 일어나지 않았던 주변섬은 비교적 문헌자료가 잘 남아 있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이제나섬도 그 중 하나로 특히 촌장을 역임했던 메카루(銘苅) 가문에는 많은 문헌 즉 고문서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슈리 조정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문헌이 많으며 류큐왕국 시대의 메카루 가문과 이제나섬의 위치 관계도 엿볼 수 있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입니다.

(식수 조림에 관한)상소문 사본

(식수 조림에 관한)상소문 사본

19세기 초, 이제나섬에 거주하는 아가리에 페친(東江親雲上)이 하사받은 표창장을 모아서 족자로 만든 것으로, 세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오른쪽은 부지토(夫地頭)였던 아가리에 페친이 쇼세이왕(尚成王) 때, '세토자시키(勢頭座敷)' 지위에 올랐을 때의 것. 가운데는 쇼코왕(尚灝王) 때, 구시카와섬과 이헤야섬의 다나미 곶에 방조림을 심은 공적으로 '자시키(座敷)' 지위에 올랐을 때의 것. 왼쪽에는 이들 공적을 기려 친구들이 보낸 와카(和歌)가 쓰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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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 앞바다의 난파선 구조에 관한)상소문 사본

(다나 앞바다의 난파선 구조에 관한)상소문 사본

1854년 연안에 좌초해 난파한 중국선의 구조 및 선체 처리를 하는데 공적이 있는 두 사람에게 슈리 조정이 하사한 포상장입니다. 반쇼(관청)에 근무하던 니시 페친(西親雲上)은 서둘러 현장에 가서 승선원 구조, 화물 인양, 잔해 처리 등을 슈리 조정과 연계하며 민첩하게 수행했습니다. 니시메 치쿠둔(西銘筑登之)은 배의 못으로 사용되는 철을 얻고자 하나 지토타이(地頭代)가 조정의 허락을 받지 않고 선재를 소각시키려고 하여 이에 반대하며 끝까지 관철시켰습니다. 두 사람의 행동이 훌륭하다고 조정에서 상을 내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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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야 개간에 관한 서류철

산야 개간에 관한 서류철

1897년부터 1906년까지 짓차쿠(勢理客) 지구(地区)의 산야 개간에 관한 일련의 서류를 정리한 것입니다. 우선 동 지구의 전체 대표 14명이 제출한 38,600평의 개간 신청에 관한 현지사의 허가서가 있습니다. 또한, 1,200분의 1의 실측 측량도가 부속한 4점의 문장도 포함됩니다. 나아가 소작 계약서 등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문서는 당시의 짓차쿠 지구의 개간 상황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키나와 전체의 토지정리 사업과 주민의 관계, 마을 산야와 개간지와의 관계성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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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헤키잔

요헤키잔

요헤키잔(葉壁山)은 '이페야'라고 읽으며 이헤야섬을 나타냅니다. 일찍이 중국인은 이와 같이 불렀습니다. 메이지 시대(1868년~1912년) 후반까지 이제나와 이헤야를 합쳐 이헤야섬이라고 했는데 중국 황제의 사신 책봉사(冊封使)의 기록에도 요헤키잔으로 적혀 있습니다. 이 세로 편액(掛床)은 세로 175.5cm, 가로 57cm의 삼나무로 만들어졌고 칠기의 퇴금(堆錦) 기법으로 '요헤키잔'이라고 돋을새김을 했으며 편액의 필자 진필현(陳必顯)의 이름과 건륭(乾隆) 57년(1792년)의 연호도 마찬가지로 돋을새김(陽刻)을 했습니다. 또한 제2 쇼(尚)씨 제14대 국왕 쇼보쿠(尚穆王) 41년에 쓴 글도 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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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와리(竹割)

다케와리(竹割)

반으로 쪼갠 두 개의 죽순대(孟宗竹)에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오른쪽은 세로 128cm, 가로 12.9cm로 '류안학성교(柳岸鴬声巧)'라는 글귀가, 왼쪽은 세로 128.8cm, 가로 12cm로 정전봉무서(庭前鳳舞棲)'라는 글이 각각 읽힙니다. 두 개가 한 세트로 도코노마(床の間)에 걸어서 감상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소장자 나카(名嘉) 가문에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나카 가문의 선조(여성)가 공무로 오키나와 본섬에 갔을 때, 관리 앞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관리가 너무 아름다운 목소리에 감동해 다케와리를 선물했다고 합니다. '학성(鴬声)'을 휘파람새 소리, '봉무(鳳舞)'를 봉황의 화려한 춤사위로 해석하면 그 당시의 정경이 눈에 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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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헤야섬 옛 기록물 사본(복사본)

이헤야섬 옛 기록물 사본(복사본)

1887년에 니시 페친(西親雲上)이 집필한 이헤야섬 구기집(伊平屋島旧記集, 1726년)입니다. 고전 일본어로 쓰여진 소책자로, 중심 내용은 이헤야(옛날에는 현재의 이헤야와 이제나를 묶어서 이헤야라고 불렀음)의 최고 신녀인 '이헤야노아무카나시(伊平屋の阿母加那志)'에 관한 것입니다. 그 수행 신녀인 후타카야다노아무에 관한 것과 금 비녀, 옥카하라, 금술잔, 침금제 과자함, 의상 등 조정의 하사품에 대한 기술도 있습니다. 아울러 메카루(銘苅) 가문의 유래와 이헤야의 우타키와 종교, 이제나 다마우둔(玉御殿)의 석조유골함(石厨子)에 대해서도 적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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